저희는 계속헤서 이사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내시는 길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내시는 길은, 순간적인 손발력을 요구하는, 단거리 경기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꾸준히 달려야 하는, 마라톤 경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일 달리고 끝내는, 잛은 경주가 아니라, 1년 365일을, 계속해서 달려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지구력과 꾸준한 성실함이 필요한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가는 동안, 침체가 찾아오고, 슬럼프에 빠지는가 하면, 일시적인 부진을 경험하게 됩니다. 달리던 걸음을 멈추게 되고, 다리에 힘이 빠지고, 그 자리에 주저 앉는, 침륜의 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소연을 듣게 되는데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열심히 길을 걸었지만, 그만 침체와 침륜이 찾아오게 되자, 이러한 말을 하게 됩니다. 27절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무엇이라고 이르고 있습니까? “내 길이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가장 자신감과 충만한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그 길을 가는 동안, 크고 작은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 오고, 마음 먹은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자, <하나님! 내 길이 숨겨졌습니다. 하나님! 내 길이 벗어났습니다>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어드리면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이사야선지자는 45장에서는, 하나님을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꼭꼭 숨어계셔서 보이지 않고, 외로운 길에 홀로 버리신 것 같아 이와 같은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길을 가는 중간에, 이러한 마음에 사로 잡히게 된다면, 그 다음에 어떤 증상으로 이어질까요? 30절을 보십시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소년이라는 말의 원어를 보면, 10대의 소년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의 전성기에 속하는 젊은 남자라는 뜻입니다. 곧 힘이 펄펄 넘치는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소년이라도, 결국은 피곤하고,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보았던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되라고 말하고, 더욱 넘어짐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길을 걷다가 찾아오는, 침체와 슬럼프와 부진과 침륜을 이겨낼 장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것이, 하나님의 대표선수였던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850명과 홀로 싸워서 불로써 승리하는 사건도 있었지만,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간구하는 침체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도, 시편 42편에서, 낙심되고, 불안하다고, 말하고, 자신과 죽음 사이가 한발자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도, 요나 선지자도 슬럼프에 빠지는 시간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한 영적 거장들도, 피곤하고, 곤비하고, 넘어지고, 쓰러졌다면, 저희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저희도 분명히, 하나님의 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지는, 낙심과 슬럼프와 침륜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내 길이 하나님께 숨겨진 것 같고, 내 길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것 같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요한 것은요, 이와 같은 피곤과 넘어짐이 언제 찾아오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곤비와 쓰러짐이 찾아왔을 때, 다시 어떻게 회복하는가? 잘못된 길을 돌이켜, 원래의 모습으로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 회복탄성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가 길을 달리다가, 걸음이 멈춰지고, 주저 앉게 될 때,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두가지 내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먼저, 피곤하고 넘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하나님을 알아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8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길이 숨겨졌고, 송사가 벗어났다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도 않으시며, 곤비하지도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이신지 알지 못하느냐? 오히려 그들에게 되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체와 낙심이 찾아오자, 하나님이 내시는 길의 끝이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이 숨어 계신 것처럼 생각되자, 하나님도 피곤하고, 곤비하시고,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분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똑똑히 알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내시는 길의, 땅끝까지를 완성하신 분이시고, 사람처럼 피곤을 느끼는 분이 아니시며, 곤비함이 없으신 분이시고, 명철과 지혜와 방법이 한 이 없으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29절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현재, 걸음을 멈춘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주저 앉아 있는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탈진해 있던 엘리야를 다시 일으키시는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진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어루만지시고, 숯불에 구운 떡과 한병 물을 먹고 마시게 하는데요. 이때 천사가 어떤 말을 하는가 하면,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저는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는 말이 참 은혜까 되었는데요. 하나님은 중간중간 걸음을 멈출 때마다, 찾아오셔서, 피곤한자에게 능력을,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해 동안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걷다 보면, 피곤해지고, 넘어질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마치 뱃데리가 방전되듯이, 모든 것이 소진되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 앉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과 능력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더욱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때 주님은 피고한 자에게 능력을, 무능한 자에게 힘을 새롭게 충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한가지 더 보시면, 우리가 곤비하고 쓰러진 자리에서, 이번에는 여호와를 앙망해야 합니다. 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에서 앙망한다는 히브리어는 카바 라는 말입니다. 그 의미가 <함께 묶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 묶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실이 단단한 밧줄과 함께 묶이면, 튼튼해지는 것처럼, 내 생각을 하나님 생각에 묶고, 내 가치관을 하나님의 가치관에 묶고, 내 행동을 하나님께 묶게 될 때, 라이프가드를 통해 물속에서 건짐을 받는 것처럼, 그 곤비한 자리, 그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할 때, 무엇을 얻습니까? 새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사용하던 힘을 재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얻게 되자, 하나님이 여시는 길을, 달음박질하여도 다시는 곤비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31절의 말씀을, 이찬수 목사님이 쓴 <보호하심>이라는 책을 보았더니,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람감 같을 것이요.> 라고 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큰 날개로 열심히 날개짓해서 창공을 비상하는 것을 오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주먹을 불끈 쥐며, ‘나도 독수리처럼 최선을 다해 날개짓해서 저 멀리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다짐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독수리는 자기 날개를 휘저으며 비상하는 새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독수리는 나는 것에 아주 약한 조류로, 날기에 굉장히 열악한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활짝 펴면 2미터에, 이르는 육중한 날개는 오히려 하늘을 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러다보니, 독수리는, 자기 날개짓 대신에 공기의 흐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태양열이 땅을 비취면 공기가 따뜻해지고 그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때문에 <상승 온난 기류>가 형성되는 것이죠. 그래서 독수리는 그 기류를 찾아들어가 날개를 쫙~~ 펼치면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참새처럼, 스스로 몸무림치며 날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승 온난 기류를 기다렸다가, 날개를 펴고 다시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 독수리의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기 스스로 몸부림치며, 수없이 날개짓을, 무한 반복하는 참새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기류에 몸을 맡기고, 날개를 펴고, 다시 솟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내시는 길을 걷은 언약 백성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시는 2018년의 길은, 항상 꽃길만 펼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마음이 무너지는 때고 있을 것이고, 때로는 몸이 피곤하고 곤비한 때로 있을 것이며, 때로는 영적으로 낙심되고 넘어지는 시간이 분명히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예방접종 같은 말씀이 되어서, 피곤하고 곤비하고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시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심으로, 독수리 같이 새 힘을 얻고, 주님이 불게 하시는 영적기류를 타고 새롭게 날아오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