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는,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가지고 일생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다보니 몇 가지 부딪히는 문제들이 있었고 정립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사도바울에게 신앙적인 답변을 요청하게 되었고바울은 몇 개의 파트로 나누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는 말씀이 고린도전서의 구성입니다.
이가운데 고린도전서 12-14장까지의 말씀은 질문에 대한 답변가운데 특별히 성령님의 은사에 대한 부분들을 다루게 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폭발적이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함께 성령의 일하심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함께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2-14장의 말씀을 통해 성령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더욱 풍성하게 성령의 은사를 누리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저는 특별히 사도바울이 가르침의 결론으로 언급하고 있는 14장의 제일 마지막절에서 참 멋진 표현을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14장 40절을 보시면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권면으로 말씀이 마무리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특별히 성령님의 은사에 대하여 성령님은 아주 인격적이신 분이시기에 품위있게 그리고 질서있게 발휘되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번역을 보았더니 <무슨 일을 하든지 예의 바르고 사려 깊게 하십시오>라고 표현하고 있고, 또 다른 성경에서는 <모든 것을 적절하게 올바른 질서대로 해야 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3주에 걸쳐, <품위있게 질서있게>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중에서 12장 1-11절의 말씀을 함께 상고해 보려고 하는데요. 여러분, 사도바울이 성령님의 활동에, 대한 답변을 주면서 가장 먼저 말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답변을 시작하는 12장 1절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여러분, 바울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가 평생 사용하는 한글이지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안다, 알지 못한다, 원하다, 원하지 아니한다 는 말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습니다.
한국어 문법가운데, 이중부정은 어떻습니까? 강한 긍정의 표현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신령한 것에 대하여,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은사에 대한 부분은, 우리가 그냥 모르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꼭 알아야 하는 부분이기에,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는 가장 긍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시작하며 사도바울이 강한 표현으로 신령한 것에 대하여, 반드시 꼭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님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게 되면, 너무 극단적인 치우침의 현상이 나타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동일한 성령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한쪽은 성령님을 지적인 영역으로 모시고 와서 성령님의 역사를 머리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증명하려고 합니다. 복음주의라는 미명하에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모두 잘라내고 이성으로 이해되고 논리로 설득되는 부분만 인정하려는 모습입니다. 성령님의 활동을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신학이라는 틀안에 가두고 움직임을 제한했기에 신앙생활이 메마르고 건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반대쪽 끝에는 똑같은 성령님을 이야기 하는데 이번에는 머리가 아닌 감정적인 부분으로만 해석하려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게 된 눈에 보이는 현상들과 신비한 영역에 매료되어서 성령의 은사를 남용하게 되었습니다. 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과 간증을 전부로 생각하여서 다른 사람의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게 되었고 더욱 강도가 높은 체험만을 추구하는 자극적인 신앙생활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령한 것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되 양극단에 있는 신령한 것에 대한 무지나 신령한 것에 대한 남용으로 치우치지 말고 이 둘의 적절한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성령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사모함이 있을 때 품위있게 그리고 질서있게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에 신령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축구를 좋아해서 매주일 밤마다 축구경기를 위해 surrey까지 가는데요. 저희팀은 주로 배나온 동네 아저씨들로 구성된, 조기축구회같은 아마추어 축구팀입니다. 10분만 달려도 헉헉거리는 저질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팀 아저씨 선수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츄어 선수이기에 공을 찰 때 한쪽 발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것입니다.저 같은 경우 공이 오면 무조건 오른발로 공이 잡고 오른쪽으로 달려가서 오른발로 슛을 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왼발을 사용하는 선수는 언제나 공을 왼발로 잡아 왼쪽으로 달려가 왼발로 슛을 하게 됩니다.
오른발이든, 왼발이든, 자신에게 익숙한 한쪽 방향만 고집하기에 동네축구선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축구선수인 메시나 호날두를 보면 현란한 기술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오른발과 왼발을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비하는 선수가 왼쪽을 막으면오른쪽으로 치고 나가고 오른쪽을 막으면, 왼쪽으로 공을 빼서 슛을 날리는 모습에 관중들이 환호하게 됩니다.
저는 신령한 것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체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한쪽방향만을 고집한다는 것이죠.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쪽으로 아니면 성령님의 현상만을 추구하는 쪽으로 쏠림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나 호날두도 처음에는 한쪽발이 익숙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을 통해 양발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듯이 저희들도 신령한 것에 대하여 고정관념에 묶여 있거나 현상만 추구하지 않도록 균형감을 가지고 양발 모두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메시와 같은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신령한 것에 대하여, 바르게 아는 것이 우리의 힘인데요. 그럼, 사도바울이 구체으로 어떤 내용을 알아야 한다고 했을까요?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라고 했던, 그 구체적인 사항들은 무엇인가 궁금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신령한 것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었던 내용을 세가지로 정리해 보았는데요.
그 첫번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가운데, 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실까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라고 말한 후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하며, 첫번째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과 활동가운데 가장 기본과 베이직이 되며 가장 중요한 사역인데요. 반대로, 성도들이 가장 잘 알지 못하고 가장 오해하는 부분이 또한 3절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내용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자신의 결단과 자신의 믿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본인이 입으로 고백한 내용이기에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이 성령님의 일하심이고 역사하심이었다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복음의 말씀이 우리 한사람에게 전달하게 하신 것도 성령님의 일하심이었구요, 그 복음을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그 말씀이 믿어지고 입을 열어 시인하고 고백하게 하신 것도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심령속에서 어떠한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도록 지키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성령님의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내가 예수님을 믿고 스스로 내가 고백하여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열심히 기도하며 성령님을 구하면 그 다음에 성령님이 짠하고 나타나셔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18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상에 끌려다니던 우리가 예수님을 저주할 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가장 귀하고 가장 복된 사역임을 믿고 확신하는 한분한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속에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으시다면 그리고 그 고백을 드릴 때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있고 확신이 있다면 이미 여러분의 심령속에서는 성령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와 현상을 강조하는 그룹에서,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떤 환상을 보거나 병고침을 받거나 장래일 일을 알아맞춰야지 성령의 사람이지 이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성령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눈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판단하기에는 위험성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속에 악한 영들도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마술사들도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병을 고치기도 합니다. 이교도들도 이상한 소리로 그들의 신에게 기도를 하기도 하고 거짓선지자였던 발람도 악한 영에 붙들려 장래에 일을 맞추기도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는 얼마든지 악한 영이, 우리에게 장난을 칠 수도 있고 우리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고 유혹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악한 영이 절대 흉내 낼 수도 없고 오직,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악한 영은 우상을 따르던 우리를 더욱 우상에 빠지게 하거나 예수님을 저주하던 우리를 더욱 저주하는 자로 만들 수는 있지만 우상에 빠져 있던 우리가 그 속에서 건짐을 받고 예수님을 저주하던 입술이,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입술로 바꾸는 것은 오직 성령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가 신령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데요. 무엇보다도, 우리의 심령속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도록 이끄셨고 지금도 그 믿음을 굳게 지키고 계시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두번째로, 사도바울이 전해주고 싶었던, 신령한 것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요. 성령님의 나타나심은 누구에게나 유익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4-7절을 보시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7절말씀 마지막에, 성령의 나타나심의 가장 큰 목적이 무엇입니까? 유익하려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펜이 있으시면, 유익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치시면서, 성령님이 일하시는 곳마다 참된 유익이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것이 하나 있는데요. 4-7절의 말씀은, 비빔밥 같은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건강식이 한국의 비빔밥인데요. 비빔밥은 서로 다른 하나하나의 재료가 어우러져서 새로운 맛을 내는 조화로운 음식입니다.
그릇에 담겨 있는 콩나물, 무채, 시금치, 호박, 고사리 등등 모두 어떻습니까? 각각의 색상이 다르고 씹을 때 식감이 다르며 조리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재료가, 빨간 고추장을 통해서, 밥과 함께 어울려지면 어떻습니까? 기가막힌 맛을 내는데요.
마찬가지로,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여러 가지가 있고 각자가 맡고 있는 직분이 서로 다르며 감당하는 사역의 내용도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채로운 비빔밥 재료가 고추장을 통해 새로운 맛으로 하나가 되듯이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은사를 행하고 직분을 감당하고 사역을 이루어가는 그 일에 고추장같이 역사하셔서, 어떤맛을 내게 하시는 것입니까? 유익이라는 맛을 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빔밥 안에 하나의 재료인 본인에게도 유익이 되고, 옆에 놓여 있는 다른 재료인 주변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되고, 비밤밥 그릇과 같은 가정과 교회공동체 안에도 유익이 되도록 역사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안에서 성령님의 은사라고 생각하면서 행하는 것들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거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데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가 아니거나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잘못된 방법으로 발휘하거나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부목사로 있을 때, 청년들 40명 정도를 인솔하여 캄보디아로 단기선교를 2주 정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캄보디아 현지에 있는 CCC선교단체와 연합하여 대학생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기 위해 청년들과 함께 갔는데요.
저희팀이 캄보디아에 있는 동안, 하루는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기도를 많이 하시는 한 권사님이 새벽예배를 마치고, 급히 저희 집사람에게 오더니본인이 오늘 기도하던 중에 성령님께서 보여주시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청년들 선교팀 가운데 큰 문제가 발생하여 위급한 일을 겪고 있으니 빨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로밍으로 전화를 했지만 때마침 선교팀이 수도가 아니라 지방 오지에 있어서 전화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교회가 난리가 났습니다. 청년들을 보낸 부모님들을 발을 동동구르게 되었고 저희 아내도 이제 아이들을 어떻게 혼자 키울 것인가? 아찔 했다고 하는데요. 다행히 선교팀가운데 위급한 일은 없었고 몇일 후 수도로 돌아와 모두 무시히 지내고 있다고 안부 전화를 했더니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저는 돌아와 모든 이야기를 듣고 그 권사님께서 기도해 주셨기에 위험한 일이 미리 막히고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고 좋은 모습으로 해석을 했는데요.
여러분, 그런데 이 권사님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방법이 되었을까요? 저는 그 권사님이 성령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할 때, <성령님께 보여주셨는데, 성령님께서 나에게만 말씀하셨는데>라는 말을 생략하고 전달했으면 어땠을까요?
본인은 직접 들었으니 더욱 간절히 중보하며 기도하면 되는 것이고요, 저희 집사람에게 와서는 보았다는 말을 생략하고 “목사님과 청년들을 위해 더욱 기도하면 좋겠어요!! 선교의 현장은 영적인 전쟁터와 같고, 수시로 위급한 일이 생기니, 안전하게 돌아올 때까지 기도하면 좋겠어요”라고 했다면 그 권사님에게도 유익이고 저희 아내에게도 유익이고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유익한 기도의 통로가 되지 않았을까요?
본인이 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자신만 듣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다보니 유익한 일이 아니라 무익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성숙하게 성령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함부로 말하거나 경솔하게 공식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유익함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기에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고 말씀하실 때 그것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을 사용하실 것이며 그 사람에게는 유익을 이루는 지혜도 함께 부어주시기에 성령님의 역사를 결코 자신을 드리고 알리는 방법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간절히 소망하기느 나의 유익을 위하여,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님의 은사를 사용하고 나타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한가지만, 더 보시면, 바울이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고 했던, 내용이 한가지 더 있는데요.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 안에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절인 11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성령의 은사는 말 그대로 선물이기에 성령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상급이 아니라 선물임을 기억해야 하는데요. 성도가 신앙의 연수가 쌓이면 자동적으로 받게 되는 상급의 의미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셔서 각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은사를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은사에는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고 나쁨의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 사람을 가장 잘 아시기에 그 사람의 형편과 처한 환경과 맡고 있는 직임과 지금 현재 필요한 것에 따라 성령님께서 적합한 선물을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는데요. 일년정도 지났을 때 아주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참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과 함께 계속해서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하는가? 심각한 고민과 갈등에 빠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저는 군대교회에서 먹고 자고 일하는 군종병으로 있었는데요. 그래서 밤마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혼자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몇 일을 야곱과 같이 힘든 일들을 끌어 앉고 씨름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성령의 은사로 방언기도를 열여 주셨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련회에 가서 그렇게 방언을 달라고 매달리며 기도할 때는 주시지 않더니 삶이 문제와 마음의 고민과 갈등을 가지고 기도할 때,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방언을 통해 새로운 기도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자 그동안 갈팡질팡 하던 마음이 잡히고 흔들리던 사명이 굳건해지고 어려움을 겪던 군생활도 조금씩 회복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성령님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부어주시되 다양하고 무궁한 은사와 능력들을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시기에 맞추어 꼭 필요한 것을 맞춤형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12장의 마지막절인 3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선택할 권한은 없지만 나의 모습을 가장 잘 아시는 성령님께서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을 믿으며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길을 보이신다는 말씀이죠.
여러분, 어려운 일을 만나셨습니까? 고민과 갈등이 많으십니까?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십니까? 나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고, 선택의 길 앞에서 주저하고 계십니까?
각 사람의 필요한 것을 아시고 은사와 능력으로, 선물하시는 성령님을 기대하고 사모하십시오. 여러분, 신령한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세상의 방법이나 사람의 방법이 아닌 성령님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은사와 신령한 것을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님께 속한 신령한 것들 성령의 은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바울은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9가지의 은사를 소개해 주고 있는데요.
8-10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 이 시대, 우리 각 사람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들이지 않습니까?
각각의 은사에 대한, 약간의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아, 유진피터슨 번역한, 메세지 성경을 보시면, 이 9가지의 은사와 선물이 이렇게 쓰고 있는데요.
지혜로운 권면 (우리는 정보가 차고 넘치는, 홍수시대를 살고 있지만, 장마에 마실 물을 더욱 찾기 어려운 것처럼, 참된 진리가 점점 사라지는 이 때에, 지혜로운 말씀을 가지고, 지헤로운 권면을 할 수 있는 은사,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닙니까?)
명료한 이해력 (점점 혼탁해진 세속의 물결이, 거센파도의 얼굴을 가지고, 우리의 가정을,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의 일터를 집어 삼키려 할 때, 지식을 말씀을 가지고, 시대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해하고, 대처하는, 은사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 않습니까?)
특별한 믿음 (이 믿음을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라, 어려운 현실속에서, 사건과 문제 앞에 무릎꿇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는, 굳건하고 특별한 믿음인데요,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이지 않습니까?)
병자를 고침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몸이 아픈 사람보다, 마음에 병을 가지고 있고, 심령이 무너지고, 정신이 아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아픈 부분을 끌어앉고, 함께 아파하고, 기도와 중보로 고치고 치유할 능력을 갈망해야 합니다)
능력을 행함 (오늘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힘을 잃어버렸고, 신뢰는 곤드박질 처버렸으며, 경건의 본질은 없고, 형식과 껍데기만 남아 있는 시대가운데, 우리는 선한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가져야 무너진 부분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포 (다시 한번 시대를 바라보면, 선지자적인 영성을 가지고, 앞날을 알아맞추는 예언이 아니라, 시대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예언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은사입니다
영을 분별함 (마지막때가 되면, 미혹의 영들이, 더욱 교묘해지고, 강해지는 것처럼, 지금 이단들과 세상의 잘못된 문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더욱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가지고, 맞서야 하지 않을까요?
방언 (주님과 더욱 깊은 기도의 세계를 맛볼수 있고, 흔들림 없이, 주님과 사귐이 있는 자리로 이끄는, 방언과 그 방언을 다시 우리의 언어로 바꾸어 낼 수 있는 방언통역의 은사는, 우리가 사모해야 할 성령님의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