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 Shore ArumDawn Church | 신앙과 삶이 무너질 때 (창12:10-20)
22072
post-template-default,single,single-post,postid-22072,single-format-standard,locale-en-us,ajax_fade,page_not_loaded,,select-theme-ver-3.5,wpb-js-composer js-comp-ver-5.1.1,vc_responsive

신앙과 삶이 무너질 때 (창12:10-20)

Intro.

창세기 말씀에 보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사건이 3번이나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13,20,26장)

아브라함이 두번, 이삭이 한번,

부전자전으로 비슷하고 동일한 스토리가 세번이나 거듭됩니다.

그리고 성경이 다루는 분량도 결코 적지 않은데

각각의 사건마다 10절이상씩 할애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세번의 모든 사건에 대해 성경이 어떠한 평가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내는 누이라고 속인 것이, 잘못되고 틀린 것인지?? 아니면 괜찮고 옳은것인지??

평가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어떻게??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가??

남자라고 한다면 위험한 순간에 더욱 연약한 아내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비겁하고 책임감 없는 남편이다.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으니, 오히려 지혜로운 처신이었다.

남자의 깊은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이렇게 생각을 하십니까?

오늘은 본문의 사건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적용하려 합니다.

성경도 아브라함에 말과 행동에 대해 가타부타의 말이 없으니,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말과 행동에 너무 메이지 말고, 폭넓은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전후좌우를 살펴볼 때,

정말 말씀이 전하고 싶은 메세지가 무엇인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것입니다.

 

신앙이 무너질 때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오늘 말씀의 시작은,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라는 기근에 대한 소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근을 만난 그 땅?? 어디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가라고 지시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머물던 하란을 출발하여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근이 들었더라.

10절 마지막에도,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두번씩이나 그 땅의 기근을 말하는데,

그냥 기근이 아니라, 심한 기근이 찾아왔다는 것이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으로 시작한 첫 걸음의 결과가 심한 기근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백성들 가는 길에 기근이 없으면 참 좋겠는데,

어떻습니까? 항상 만사형통이 아니라, 기근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첫걸음부터 심한 기근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답답한 것은,

심한 기근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잠잠히 그 땅에 있으라고 하시던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고 하시던지,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심한 기근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데  어떠한 언급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아브라함처럼 영적인 심한기근과 하나님의 침묵으로 신앙이

무너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분명히,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걸어왔는데 어떻습니까?

예상치 못한 영적기근과 광야를 만남으로 신앙이 흔들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가 찾아와 심령이 메마르고,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아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떄가 있습니다.

영적 기근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속시원하게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을텐데,

하나님마저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진 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혹이나, 현재 여러분의 신앙과 영적인 상태가 오늘 말씀의 아브라함처럼 영적 기근을 만났다면,

오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삶이 무너질 때

11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사래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 였고, 사래의 나이가 65세였습니다.

객관적인 설득력은 떨어지지만, 아브라함은 사래의 미모때문에 심각한 고민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방법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부분을 묵상하면서, 왜 성경이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대하여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의 거짓말보다, 사래의 미모보다, 더 중요하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 시대가 어떠했는지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누이로 속인 것은 갑자기 위급한 일이 생겨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며 중간에 작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서로 입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아브라함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외부로부터 낯선 나그네가 들어왔는데, 여자가 이쁘면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 했던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들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할 때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래를 애굽의 왕인 바로에게 빼앗기에 되는데, 애굽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바로왕부터

그러한 일이 앞장서고 있으니, 그 아래에 있는 백성들의 모습은 어떠했을지 안봐도 비디오입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두번째로 속이는 20장 11절도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이번에는 애굽이 아니라 블레셋의 그랄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그곳 역시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여  90이 가까운 할머니를 누이라고 속여야 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애굽이나 그랄이나 상관없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있기 나그네에게

이쁜 부인이 있으면 얼마든지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은 시대였습니다.

냉혹한 현실속에서 아브라함의 삶의 기둥마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낯선 곳으로 이주하였지만 새로운 곳에서 나그네의 삶은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처절한 현실속에서 삶의 기둥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신앙과 삶이 무너질 때>인데요.

오늘 본문속에 아브라함의 현실을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삶의 기둥이 무너졌더라도 신앙의 기둥이 바로 서 있으면 어떻게든 기도하고 예배함으로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의 기둥이 무너졌더라도, 삶의 기둥이 바로 서 있으면

삶속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바라보며 무너진 신앙을 다시 차근차근 세워가는 바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가지 기둥이 함께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영적 기근과 냉혹한 현실이 함께 찾아 왔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말씀속에 아브라함의 모습이 남이야기 같지 않고 아브라함의 무너짐에 감정이입이

되시는분 계십니까?

삶의 기둥이 무너진 분이 계시다면,

신앙의 기둥이 흔들리는 분이 계시다면,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생활과 신앙의 기둥이 동시에 허물어졌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회복하시고 무너진 부분을 세워가는 하나님의 손길을 함께 바라보길 소망합니다.

 

삶의 기둥을 세우실 때

이제 말씀의 관점을 바꾸어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무너진 기둥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제는 아브라함의

무너진 기둥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무너진 두기둥 가운데,

먼저 삶의 기둥을 세우시는 모습을 보면,

그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활동하시고 움직이시는 모습이 포착됩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0절이 넘는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유일하게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17절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행하심은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관심과 초점은 아브라함이 어떤 거짓말을 했는가? 그가 얼마나 정직했는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현실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의 대표인 바로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눈여겨 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번 사건을 통해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고 약한자의 것을 빼앗고 돈과 물질로 모든 것을

무마하려고 했던 사회적인 못된 습관을 통해 아브라함 부요하게 하시고 바로의 집은 망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의 잘못이 문제입니까?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사람들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정직과 바로왕의 공적인 정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한 동안 교회안에서 “정직합시다”라는 캠페인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시간마다 정직하게 살자고 구호를 외치고, 자동차에 정직이라는 스터커를 붙이고 다녔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해야 하고 진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있다면 사회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세습하는 것이 정의와 공의의 관점에서 잘못됐다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지 말고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공의와 정의의 관점에서 종교인들도 세금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면, 유예기간을 요구하지 말고, 바르게 세금을 낼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정직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집착하고 연연하고 정죄하지만,

큰 의미로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무관심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정직보다 바로의 공의를 더 크게 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주 새벽예배 본문이 아모스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모스가 활동했던 시대는 솔로몬 이후 제 2의 전성기라고 할 정도로, 잘먹고 잘 사는 풍요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아모스 선지자의 줄기차게 외쳤던 메세지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풍족하고 넉넉한 삶이고 수많은 절기와 성회와 제물이 드려지는 예배가 있었지만 그들의

삶을 한꺼풀만 벗겨내면 하나님의 정의를 쓴쑥으로 바꾸고 공의를 땅바닥에 던져 버리는 시대였기에

아모스 선지자는 경고하기를 너희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물같이 흘려보내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새벽예배 본문가운데,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현재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이 상아 상에 누워서 기지개를 펴고 어린양과 송아지를 잡아 먹고

반주에 맞춰서 흥얼거리고 포도주를 대접으로 마시고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는 일들에 빠져

잊어버렸던 것은 무엇입니까?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아니하는자로다”

요셉의 환난이 무엇일까요? 제 이름이 정요셉인데 저희 집에 있는 환난을 걱정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현재 북이스라엘을 구성하는 10개 지파가운데 가장 대표성을 가진 지파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입니다.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요셉의 아들이죠. 그래서 요셉의 환난이라는 것은

북이스라엘에 살아가는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웃과 주변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 했다는 것입니다.

그땅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 같은 나그네들 사회적 약자들 기근을 만나고 환난을 만난 사람들을

모른척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남은 것을 빼앗으려는 바로왕과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무너진 삶의 기둥을 다시 세워주시되 삶의 기둥을

무너 뜨린 이유와 원인이 되는 사회적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해 바로의 가정은 무너뜨리고

아브라함의 가정은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늘의 사건을 거울 삼아 믿음의 조상이 되려면,

이제부터 정의와 공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부르신 진짜 목적과 이유는,

넓은 땅을 주고 많은 민족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진정한 목적은,

아브라함의 자식과 권속들이 여호와를 도를 지켜 의와 공도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 위해 장소와 공간이 필요했기에 땅을 약속하셨고

정의와 공의를 행할 사람이 필요했기에 많은 민족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정의와 공의를 빼고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혹이나 생활의 터전과 삶의 기둥이 무너지고, 흔들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며,

여호와의 도를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너진 일상과 매일매일의 삶의 기둥을

다시 세워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신앙의 기둥을 세우실 때

이번에는 무너진 신앙의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요

애굽에서 나온 아브라함 가정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 보았더니,

13장 3-4절을 보시면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라함의 행로를 추적해 보니,

애굽에서 나온 다음 네게브 지역을 통과하여,

벧엘과 아이 사이에 이르게 되었는데,

말씀을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곳이라고 강조합니다.

펜을 가지고 계시면, 처음으로 라는 말에 밑줄을 긋고, 별표를 하십시오.

아브라함의 무너진 삶의 기둥이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는 자리에서 회복되었다면,

아브라함의 무너진 신앙의 기둥은 어디에서 회복되는 것입니까?

처음으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예배하던 자리를 찾았고,

그 자리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온 아브라함이 어떤 심정과 마음으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까요?

하나님이 다루시는 믿음의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 어려워졌다고 기근을 피해 쉽게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던 일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나그네가 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아내를 빼앗기고 수치를 당했던 모든 일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했음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는 다시 돌아온 처음으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살기로 다짐하며

온 마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의 무너진 신앙,

아브라함의 침체된 믿음,

아브라함의 흐려진 소명,

처음으로 자리에서 회복시켜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던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사명으로 충만해졌던 것처럼,

아브라함도 처음자리를 기억하며 벧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과의 첫사랑은 회복되고,

예배는 새로워지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풍성해졌습니다.

제주도 김녕에 가면 미로공원이 있습니다.

4000평이 넘는 공원안에 수많은 갈래길과 막다른 길이 있습니다.

입구를 출발하여 출구에 도착할 때까지

연필로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발로 걸으면서 바른 길을 찾는 곳입니다.

미로공원에 가면 저 같이 거억력이 나쁘고 길을 잘 찾는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데, 공원 한가운데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전망대에 올라가보면 공원 전체를 한눈에 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 있어서,

벧엘은 전망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막다른 길에 섰을 때 바른 길을 찾기 위해 전망대로 올라가듯이

신앙과 삶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처음으로의 자리로 인도하셨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