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 Shore ArumDawn Church | 가장 좋은 길 (품위있게 질서 있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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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길 (품위있게 질서 있게 2)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2017년도 달력이 한장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고 하는데요. 12월의 마지막 발걸음까지,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옆에 계신분들과 인사! <품위있게 질서있게 살아가는 한달이 되십시오>

저희는 지난주부터 <품위있게 질서있게>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린도전서 12,13,14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고린도전서는,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가지고, 일생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다보니, 몇 가지 부딪히는 문제들이 있었고, 잘 정립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사도바울에게 신앙적인 답변을 요청하게 되었고, 바울은 몇개의 파트로 나누어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는 내용이 고린도전서에 담겨됩니다.

이중에서, 12-14장의 말씀은, 질문에 대한 답변가운데,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성령님의 은사에 대한 부분들을 다루게 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폭발적이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동시에 성령의 일하심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함께 나타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바로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성령의 은사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방법을, 편지를 통해, 소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희는 지난주 이가운데, 바울이 강조했던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노하노니>라는 말을 중심으로, 12장의 내용을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이어서, 13장의 말씀, 너무도 유명하고 잘 알려진, 사랑장으로 통하는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혹시 햄버거를 좋아하시나요?

아무래도, 캐나다에서 살다보면, 햄버거를 먹을 일이 자주 생기게 됩니다. 어떤 분은 햄버거를 시켰는데, 햄버거에 햄이 들어 있지 않다고 화를 냈다고 하는데요. 햄버거의 시작은, 독일의 함부르크 지역에서 시작된 음식이라고 합니다. 함부르크 사람들이, 질이 좋지 않은 고기를, 잘게 다져서 먹기를 시작했기에, 함부르크에 er 붙어서, 햄버거라고 부르게 되었되니, 햄버거에 햄이 들어있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지역으로 이주하던 이민자들이, 배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자, 출발할 때 가져온 고기들이, 모두 딱딱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딱딱해진 고기들을 모두 모아서, 잘게 다진 다음 양념을 첨가하여 굽게 되었고, 흔들리는 배안에서 급히 먹기 위해, 빵 사이에 넣어서 먹기 시작한 것이 햄버거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햄버거는 우리와 같은 이민자들의, 눈물젖은 빵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설교를 시작하면서, 햄버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희가 함께 살펴보는 12장, 13장, 14장의 구조가, 햄버거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품위있게 질서있게>라는 주제를 가지고, 성령님의 은사를 설명할 때, 제일 먼저 12장에서, 성령님의 은사들을 쭉 열거한 후에, 이 모든 은사는 반드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31절의 말씀을 통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14장에서, 다양한 은사가운데,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예를 들면서, 모든 은사들은, 유익과 함께, 세움이라는 관점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40절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세우고, 상대방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움는 일로 나타날 때, 품위있고, 질서있는 모습이 가능하다고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햄버거 사진을 보여주시면, 그래서 유익이라는 말로 정리되는 31절의 12장 말씀은 위에 올려지는 빵이고, 세움이라는 말로 마무리되는 40절의 14장 말씀은, 아래에 깔리는 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이에 끼어 있는 말씀, 오늘 보시는 13장의 짧은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치 햄버거 빵사이 끼어있는 패티와 같다는 것입니다.

가운데 들어있는 패티의 종류에 따라서, 햄버거의 이름이 달라집니다. 소고기가 들어가면, 비프버거, 닭고기가 들어가면, 치킨버거, 고급스럽게 연어가 들어가면, 셀몬버거가 되는데요.

<품위있게 질서있게> 라는 가게에서 판매하는 햄버거는, 성령의 은사라는 빵안에, 믿음을 넣는 믿음버거가 있고, 소망을 넣은 소망버거가 있고, 사랑을 넣은 사랑버거 있는데, 이중에서 고린도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점수로 매겨서, 사랑이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은사에, 꼭 필요한 요소이지만, 특별히, 은사의 혼란이 나타나고, 오해가 생기고, 자랑거리가 되고, 심각한 부작용이 있는, 고린도교회에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장인 13장의 말씀은요, 일차적으로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내용으로, 이해하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애편지를 쓸 때, 13장을 인용하고, 결혼식 주례에 당골로 등장하는 구절이지만, 이 13장은, 남녀간의 사랑을 언급하기 보다는, 일차적인 목표가, 성령의 은사라는 빵안에서, 그 은사를 품위있게 질서있게 사용하는 방법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사도바울은 이렇게 가장 중요한 사랑을, 12장의 마지막절인, 31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12장 31절을 보시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바울은 12장에서 여러가지 다양한 은사와, 신령한 것들을 소개한 후에,

13장의 사랑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31절을 연결고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다양한 은사들을, 정말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데, 모든 은사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인가? 13장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을 보시면,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에서, 가장 좋은 길을 The most excellent way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필요하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중요한 길과 방법은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것이죠.

저희가 보는 한글성경에는 13장 위에 소제목이, 그냥 <사랑>이라는 짧은 단어로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의 소제목은 12장과 연결하여, Love 콤마 the most excellent way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이 소개하는 가장 좋은 길인 13장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사랑을 길이라고 표현했으니, 사랑의 길의 출발과 진행과 도착은 어떠한지? 사랑의 길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본다면, 이 사랑이 우리에게도 유익과 세움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하는, 가장 좋은 길인, 사랑의 길의, 출발점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우리가 출발지점에 서서, 제일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하는데요.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구하고,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기에 앞서서, 가장 먼저 무엇을 체크해야 하는가?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1-3절을 읽어보실 텐데요. 각절마다 반복되는 표현이 무엇이 있는가 살펴보시면서, 1-3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러분, 각절마다 중간중간에 어떤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각절마다 앞에는 긍정적인 내용을 말하고, 뒤에는 부정적인 내용이 말하면서, 중간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긍정적인 것들이 있어도, 소용이 없고, 의미가 없고,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얼마나 놀라운 체험이며, 신비한 은사입니까? 하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귓가에 맴맴 거리는 매미소리같이, 씨끄럽고, 요란하고, 귀를 닫게 만드는, 잡음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언할 수 있는 능력, 모든 비밀을 아는 지식,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어떻습니까? 아마, 이런 은사가 나타난다면,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들 것이고, 한순간에 스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하여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엄청난 일처럼, 날리법석을 떨지만, 그 안에 사랑이 빠지게 되자, 마지막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무하고 공허한 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심지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아낌없이 희생하고, 목숨까지 올인한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없으면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고, 아무런 열매가 거기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기 전에, 

예언하고, 지식을 말하고, 믿음을 행하기 전에, 

구제하며, 몸을 불사르기 전에, 무엇을, 점검하라는 것입니까? 

사랑의 마음에서 시작하고 있는지, 질문하고, 체크하고, 확인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에, 급하고 강한 바람이 임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에게 내려오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신비한 사건들과 표적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 이후에, 예루살렘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능력이 임하게 되자, 교회는 점점 부흥하여 성장하였고, 성도들은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함께 공동체의 덕을 세웠으며, 전심으로 찬미하며 예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자, 심지어는 교회 외부에 있었던, 교회를 다니지 않는, 넌크리스챤들에게, 칭송을 받는 모습으로, 성령의 역사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어떻습니까? 이들에게도 똑같은 성령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교회 못지 않게, 폭발적이고, 놀랍고, 신비한 일들이 많았던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와 신령한 능력이 나타난 이후, 이상하게 고린도교회는 혼란스러워지고, 파벌이 생기고, 분쟁이 끝이지 않고, 영적인 교만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루살렘교회와 고린도교회에 강력하게 임하신 분은, 동일하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한교회는 긍정적인 결과로, 한교회는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된 분수령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 원인을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사랑에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상한 음식과 같기에, 오히려 배탈이 나고, 부작용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씨끄럽고 요란스러운 일로, 의미없고 공허한 일로, 유익과 열매가 없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은사가 상한 음식이 되지 않도록, 우리가 정말 사랑의 시작하고 있는지, 늘 점검하고 돌아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주보와 함께, 2018년도 사역신청서를 받으셨을텐데요. 다음주 전체교인총회에서 다시 설명을 드리겠지만, 건강한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동역자의 마음을 가지고, 함께 협력할 때 세워진다고 생각됩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가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고 사역할 때, 하나님의 일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아름다운교회가, 두갈래의 길 가운데, 고린도교회의 길이 아니라, 예루살렘교회의 길을 걷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습니다. 두 갈래길의 차이는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었습니다.

한주간 동안, 내가 사랑으로 사역하고,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기도하며 준비해 주시고, 2018년에도 성령의 은사와 능력들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교회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두번째로 우리가 가야하는, 가장 좋은 길인, 사랑이라는 길의, 과정과 진행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장 좋은 길을, 출발할 때,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를 점검하고, 체크하며, 시작했다면, 그 다음으로, 가장 좋은 길을 가는 동안, 필요한 것들이 있는데요. 이번에는, 4-7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시면서, 사랑에는 몇가지의 특징이 있는지,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시겠습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러분, 사랑의 과정을, 몇가지로 말하고 있습니까?

무려 15가지로 세분화시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부터 시작하여서,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 15가지로 풀어 놓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마, 학창시절, 과학시간에 프리즘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신 적이 있을실텐데요. 삼각형 모양의 프리즘에, 빛줄기를 통과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빛이 한줄기로 쭉~~ 들어왔는데,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굴절이 되면, 무지개처럼 여러가지 다양한 색상들로 쫙~~ 퍼진다는 것입니다.

마찬입니다. 사랑도 우리안으로 들어와서, 그 사랑이, 우리안에 있는, 다양한 은사들을 통해, 나타나고 발휘되면, 마치 프리즘처럼,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생활속에는, 사역속에는, 사귐속에는, 열심히 은사를 사용하면, 오래참음부터 시작하여서, 모든 것을 견디는것까지, 다양한 칼러의 사랑의 흔적이 보여지는데, 그 길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가장 좋은 길, the most excellent way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15가지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모두 살펴보면 좋겠지만, 시간관계상, 15가지를, 하나의 묶음으로 처리해서, 전체적인 내용을 보시면, 몇가지 특징이 있는데요. 먼저, 바울은 15가지의 과정을 언급할 때, 사랑을 마치 사람처럼 의인화하여서 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대신에,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실감이 나는데요.

정요셉은 오래참고, 정요셉은 온유하며, 정요셉은 시기하지 않으며, 정요셉은 자랑하지 않으며, 정요셉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여러분, 이렇게 사랑을 의인화 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랑의 특징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받는 대상의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오래참는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 사랑하고, 상대방이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면, 사랑 할 수 있고, 상대방이 시기하지 않으면 사랑해 주고, / 상대방이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사랑의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은사라는 프리즘을 통해 나타나는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신분과 행동과 자질과는 상관없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내가 오래 참고, 내가 온유하고, 내가 시기하지 않고, 내가 성내지 않고, 내가 무례히 행하지 않고, 내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바울은 15가지의 특징을 묶어서 이야기 할 때, 모두 동사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랑은 무엇무엇이다’라는 말하며, 행동하고 움직이고 실천하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의 사랑은요, 형용사에 관심을 갖습니다. 열정적인 사랑, 헌신적인 사랑, 아름다운 사랑, 풍성한 사랑 등등, 사랑을 꾸미고 수식하는 말에 공을 들이지만,

성령의 은사를 통한 사랑은, 입에서 맴도는 듣기 좋은 형용사의 수식이 아니라,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입으로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손과 발의 수고와 희생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도, 사랑을 언급하며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외쳤던 것이고,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에게 보이실 때, 설교와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직접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랑이 동사임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형용사적 사랑은 너무 잘 합니다. 각양각색의 미사어구를 사용해서, 사랑을 기가막히게 묘사하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약한 것은 무엇입니까? 동사로서의 사랑에는 취약점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도, 성령의 은사를 통해, <오래참음에서부터 모든 것을 견디는 것까지> 사랑을 동사로 보여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한가지만, 15가지 묶음의, 전체적인 특징은, 모두가 현재시제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번 사랑함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실천되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동사의 시제를, 현재시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모든 백성들이 강을 건널 때까지, 강바닥에 굳게 서서,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켰던 것처럼,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일회용품 같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프리즘을 가지고, 계속해서, 사랑을 나타내고 또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15가지 사랑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것 하나 쉬운 것이 없고, 어느것 하나 자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과, 반대의 내용이기에, 실천하기 어렵고 만만치 않지만, 바울은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행해야 하는 숙제이기에 현재시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숙제를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학자들은, 바울이 15개의 순서를 정할 때, 고린도교회 가운데, 가장 결핍된 사랑의 영역으로부터 순차적으로 열거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시는 차안에서, 4-7절의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보시면서,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현재시제의 사랑의 동사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고, 차에게 내리면서부터 시작되는 한주간의 삶속에서, 프리즘처럼, 그 내용을 실천하고 적용하고 살아내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길의 도착점과 결과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는데요.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사랑의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행하고, 노력하면, 사랑의 길, 끝에는 어떤 열매와 결과가 있을까요?

우리가 처음 보았던 단락에서, 사랑이 없다면 그 결과는 씨끄럽고, 요란스럽고, 의미없고, 허무하며, 아무런 유익과 열매가 없다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반대로 사랑이 있다면, 우리가 프리즘이 되어, 계속해서 사랑의 동사들을 살아낸다면, 어떤 결과가 있는가?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행하던 은사들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1절도 보시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아이와 같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사랑의 길을 통하여,장성하고 성숙한 모습을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12절도 보시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같이 희미하나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전에는 거울처럼 희미하던 것들이,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리해 보시면, 부분적이던 것이 완전해지고, 어린아이와 같던 것이, 장성한 사람이 되고, 거울처럼 희미하던 것이,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은사들은 어떻습니까? 극히 부분적이고, 청동거울처럼 뿌옇고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새벽에 방언으로 기도하다 보면, 가끔씩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만약 병을 고치는 은사가 있다고 해도, 모든 병을 고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능력을 행하는 은사가 있다고 해도, 매일매일 365일, 능력을 행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예언의 은사가 있어, 정말 장래의 일을 맞추었다 해도, 그것은 아주 극히 부분적인 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어린아이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더 좋은 것이라고, 서로 자랑하고, 다투는 것처럼, 부분적이고 희미한 것을 가지고, 자신의 은사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은사는 우습게 여기며, 시기하고, 자랑하고,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날것과 같은, 자신의 은사를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잘 포장하여서, 선용하게 되자, 오래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지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게 되자 어떻습니까?

자신의 은사가 부분인 것을 알고, 온전한 그림을 그리게 되고,

어린아이와 부분별하게 행하던 일들을, 성숙함으로 감당하게 되고,

나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와 목적을 희미하고 안개와 같았는데, 이제는 하님의 얼굴앞에 서 있는 것처럼,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선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길을, 처음에 출발 할때만 해도, 부분적이고, 미성숙하고, 희미하던 것들이, 가장 좋은 길 끝에서, 온전해지고, 성숙을 이루고, 선명해 지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이 주시는 풍성하고 놀라운 은사와 선물을 기대하고 갈망하시고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다양한 은사와 신령한 것들은, 가장 좋은 길, 사랑의 길에서, 사용하심으로, 온전함과 성숙함과 선명함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고백을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요.

잘 아시는대로, 수많은 그리스도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짐승들에게 찢기우며 순교를 당했던 가슴 아픈 역사가 있었는데요. 당시 순교를 앞두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에 이러한 사랑의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할 때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낼 것입니다.

나를 구타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의 흔적을 보일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를 사랑의 피를 흘릴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들의 증오의 심장을 녹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도, 가장 좋은 길이, 사랑의 길임을 알았기에, 이와 같은 사랑의 고백을 당당히 할 수 있었는데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이 열려 있음을 기억하며, 사랑으로 길을 시작하고, 사랑으로 계속해서 걷고, 사랑으로 끝자락에서 가장 귀한 열매를 품어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